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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도" 리뷰 — 떫게 시작해서 달콤하게 익어가는 가족의 이야기

by zeranoom 2026. 3. 26.

극장에서 5,339명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든 독립영화 한 편이 넷플릭스 국내 TOP10 영화 부문 2위에 오르는 반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신예 권용재 감독의 장편 데뷔작 '고당도' 이야기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영화이지만 때마침 볼 영화도 없고 넷플릭스 순위권에 있기에 별 기대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기묘한 설정에서 출발합니다. 며느리가 살아있는 시아버지의 부고 문자를 실수로 먼저 보내버리고,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대신 가족들은 부의금을 챙기기 위해 가짜 장례식을 강행하기로 합니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딘가 살짝 정신 나간 설정입니다. 동양권 문화에서 가족은 일종의 침범 불가한 성역에 가깝고, 장례는 그 성역 안에서도 가장 엄숙한 의식이니까요. 영화는 바로 그 금기의 영역을 스스럼없이 건드립니다.
예술영화란 추상화와 닮아 있습니다. 보는 내내 뭔지 알 수 없다가도, 다 보고 나면 묘한 여운이 남는 방식 말입니다.

<고당도>도 그렇습니다. 초반의 설정은 분명 가볍고 엉뚱한 블랙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며 서서히 달라집니다. 감독 스스로 가족을 '제철 과일'에 비유했듯, 처음에는 떫게 시작된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익어가는 구조입니다.
강말금과 봉태규가 이끄는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입니다. 강말금은 냉소와 애정을 동시에 품은 인물을 입체적으로 소화해냈고, 봉태규는 찌질하지만 어딘가 측은한 아버지를 능청스럽게 풀어내며 블랙 코미디 특유의 긴장감을 살려냈습니다. 초반부의 참신한 설정과 개성 강한 배우들의 연기는 분명 인상적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이 다소 늘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가 본래 가져야 할 날카롭고 신랄한 사회 풍자가 조금 더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결말은 결국 "가족끼리는 뭉쳐야 한다"는 익숙한 메시지로 수렴합니다. 그 귀결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는, 가족을 이상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합니다. 누군가는 희생하고, 그 희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하게 포장되는 가족이라는 기묘한 조직의 민낯을 담담하게 포착합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가족이라도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화가 나면 화를 낼 수 있는 보다 건강한 관계의 가능성을 조용히 물어봅니다.
극장에서는 다소 불편하고 찝찝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히려 영화가 남기는 여운의 정체일지도 모릅니다. <고당도>는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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