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별 기대 없이 극장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영화라고 하면 요즘 어딜 가나 애니메이션 실사화 얘기뿐이고, 그쪽 영화 시장이 예전만 못하다는 건 업계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한 10분쯤 지났을까, '아, 이건 다르다'는 감각이 왔습니다. 그리고 137분 내내 그 감각은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술 취한 노숙자가 던진 한 마디
이야기는 황당할 정도로 단순하게 시작됩니다. 자판기를 발로 차다가 경찰에 붙잡힌 초라한 중년 남성 스즈키 다고사쿠.
유치장에서 횡설수설하던 그가 느닷없이 한마디를 던집니다.
"지금부터 1시간 뒤, 아키하바라에서 폭탄이 터질 겁니다."
경찰들의 반응은 당연히 '또 미친 사람이네' 수준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진짜로 터집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스즈키는 "폭탄은 아직 더 있다"면서 1시간마다 힌트를 줄 테니 맞혀보라는 기괴한 게임을 제안합니다. 취조실이라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협상가 루이케와 스즈키의 심리전이 시작되고, 밖에서는 경찰들이 도쿄 전역을 뒤집으며 폭탄을 찾아 뛰어다닙니다.
구성 자체는 전형적인 지능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특별한 건, 그 전형적인 틀 안에서 놀라울 만큼 밀도 높은 장면들을 뽑아낸다는 점입니다. 취조실 안의 정적인 두뇌 싸움과 도심을 가로지르는 동적인 수색 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방식이 특히 일품인데, 어느 한쪽도 템포를 죽이지 않으면서 긴장감을 끝까지 끌어올립니다. 정말이지 한순간도 눈을 떼기가 어려웠습니다.
사토 지로, 이 분 원래 코미디언 아니었나요?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은 단연 사토 지로입니다. 그동안 주로 코믹한 캐릭터로 사랑받아온 배우인데, 이번 작품에서의 변신은 그야말로 소름 돋는 수준입니다. 어수룩하고 한심해 보이는 외모 뒤에 서늘한 광기를 숨긴 스즈키를 연기하는 그를 보면서, '일본판 조커'라는 수식어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제49회 일본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비롯해 각종 시상식을 휩쓴 게 이해가 되는 퍼포먼스예요. 연기 인생의 정점이라는 평이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야마다 유키가 연기하는 협상가 루이케도 훌륭합니다. 스즈키의 페이스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냈습니다. 두 배우의 기 싸움이 화면 가득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취조실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부분입니다.
재일교포 3세 작가가 던진 질문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지점은 원작 소설의 작가가 재일교포 3세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표면적인 폭탄 테러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 사회의 계층 갈등과 관료주의의 모순 같은 불편한 이면을 꽤 날카롭게 건드립니다.
보면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고요. 사회적 동물인 이상 내 본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니까요. 그런데 그 가면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는 가면을 아예 안 써도 되는 힘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가면을 몇 개씩 겹쳐 써도 여전히 살기 버겁습니다. 억눌린 욕망은 감추면 감출수록 더 위험한 형태로 커지기 마련이고요.
영화가 '폭탄'이라는 소재를 고른 건 그냥 스릴러 장치가 아니라, 바로 그 억압된 무언가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안에 폭탄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 아닐까 — 하는 질문을 관객에게 슬쩍 던져놓고, 영화는 끝납니다. 그렇게 무겁지는 않지만,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 한 번쯤 곱씹게 되는 여운이 꽤 좋았습니다.
일본 영화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느낌을 최근 들어 자주 받는데, <폭탄>은 그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탄탄한 원작, 촘촘한 각본, 배우들의 괴물 같은 연기력이 한데 맞물린 결과물. 지적인 추리물과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신다면, 이건 그냥 넘기기 아까운 작품입니다.